걸어온 길

실향민의 아들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시골 농가에서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6.25 한국전쟁 당시 흥남에서 흥남 철수 작전 무렵(1950년 12월 23일) 메러디스 빅토리호 탑승, 피난을 내려와 거제에 정착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하였고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가 경남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평소 과묵했던 아버지께서는 자랑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않고 교복을 맞춰주겠다며 그를 국제시장에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많았지만, 그에게 가난은 오히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또 어릴 적 가난했던 기억은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되어, 불우하고 어려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돕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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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 중에 피난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난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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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청년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조리하고 불공정한사회에 대한 저항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국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문재인 대통령은 1975년 4월 11일 유신독재 반대 시위를 이끌다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강제 징집되어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복무하였다.
특전사 복무 중 당시 특전사령관 정병주와 공수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역 후 경희대학교에 복학해 1980년 복학생 대표로 신군부 세력에 항거하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시행 당일 밤 긴급 체포, 청량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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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된 지 얼마 안 돼 입영영장이 나왔다. 신체검사도 안 받은 상태였다. 신체검사 통지서와 입영통지서가 함께 날아왔다. 입영 전날 신체검사를 받고 다음 날 입영하는 강제징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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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옥중에서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 후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쳤지만, 유신반대 시위 전력이 결격 사유가 되어 판사 임용에 탈락하였다.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것’이 변호사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그는 결국 이런 제안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돌아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때 처음 맺어졌다.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은 학생운동 사건과 노동운동 사건들이 많았다.
그는 탄압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들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진정으로 공감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들을 변론했다.
당시 학생회 활동을 했던 많은 학생들은 ‘그 당시 문재인 변호사의 얼굴을 지겹도록 보았다’고 기억한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과 1996년 8월 발생한 페스카마호 사건에서 조선족 선원들의 변호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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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법관과 변호사가 가끔 식사도 하는 게 자연스럽고 관례였는데 문재인 변호사는 한 번도 같이 식사한 적이 없다.
재판에서 문 변호사를 여러 번 뵌 적이 있는데 한 번도 식사를 못 한 게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부산 법조계에서 문 변호사는 판사들과 밥 안 먹기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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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2003년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만 했을 뿐, 국정운영 경험이나 행정경험이 없었던 그였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설득 끝에 민정수석 자리를 받아들였다.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 악화로 1년여 동안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민정수석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네팔 히말라야를 여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접하고 곧장 귀국하여 탄핵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하여 법적 대응 전반을 도맡았다. 탄핵재판 중에 있었던 탄핵반대 촛불시위 현장에도 참석하였다.
탄핵심판이 기각되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과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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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큰 비밀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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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문재인

2009년 5월, 갑작스러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상주가 되어 서거 발표부터 장례 준비를 위한 회의주재까지 도맡았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구였고, 동지였으며,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65,336표(55.05%)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범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4,692,632표(48.0%)로 패배했다.
2015년 2월 8일에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선출(45.3%)되었고, 2016년 1월까지 새로 개편된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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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정치를 바꾸겠습니다.
동지여러분! 함께 갑시다.
동지들의 길이 대한민국의 길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영광의 시대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진군을 함께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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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2016년 11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 앞장섰으며,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과 함께 촛불을 든 국민들의 의사를 대변하고 이들과 시종일관 함께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결정된 조기 대선에서 든든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여 13,423,800표(41.1%)의 지지율로 제 19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일어선 그는 이번에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였고, 그는 직책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대통령의 지위가 의미를 가진다고 믿었다.
2022년 5월 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에서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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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은 지난겨울 촛불혁명으로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나는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대통령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많은 신생국가들처럼 대한민국 현대사도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로 이어지는 고단한 역사를 이겨냈습니다.
마침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 모두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